[행주산성] 알아보자.

2018. 4. 23. 15:36

행신동에 살고 행주산성에 종종 들리는 쪼꼬미 인사드립니다.


행주산성과 멀지 않은 곳에 살면서 행주산성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것 같아서 공부를 해봤습니다.


꼭 행주산성 주변에 살지 않더라도 우리나라의 역사가 담겨있는 곳이니 이방인 분들도 함께 공부해보는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럼 권율장군님을 만나러 가볼까요오오~?


행주산성(幸州山城)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의 덕양산에 있는 넓이 0.16km2 산성이다.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의 대첩지로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56호로 지정되었다.


행주산성은 고양시의 서남쪽 끝 한강 연안에 덕양산에 위치한 산성으로, 7~8부 능선에 축조된 토성으로 둘레는 1km이다. 1593년 권율 장군이 왜군을 물리친 행주대첩의 전적지이다.

1603년에 세운 행주대첩비가 산 정상부에 있으며, 1845년에 건립한 행주대첩 <중건비>가 행주서원 기공사 앞에 세워져 있다. 지금의 정상부 기념비는 1963년에 세운 것이다. 1970년에 행주산성 보수정화사업으로 대대적인 정비와 권율의 사당인 충장사(忠莊祠), 충의정, 덕양정, 진강정 등을 짓고 정문인 대첩문을 세웠다.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D%96%89%EC%A3%BC%EC%82%B0%EC%84%B1


1. 행주산성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요?

준비물: 사진기, 등산화, 필기도구
* 산에 오르기 위해 발이 편한 등산화를 신고 가세요.
* 역사의 현장이니 필기도구와 사진기를 가져가면 좋아요.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행주산성은 흙을 이용해 쌓은 산성이에요. 우리에게는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과 선조들이 왜군을 상대로 싸워 크게 이겼던 행주 대첩으로 알려지게 됐지요.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 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요.
행주산성은 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창릉천이 산성을 에워싸고 돌아, 방어하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어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 순찰사였던 권율은 군사를 거느리고 행주산성에 머물렀어요. 이때 한양에는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후퇴한 왜군 3만여 명이 모여 있었어요. 그들은 벽제관에서 명나라 이여송 장군의 군대를 크게 이긴 후여서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지요.

3만여 명의 왜군은 행주산성을 겹겹이 둘러싸고 9차례에 걸쳐 공격해 왔어요. 그러나 왜군은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모두 패배하여 후퇴하고 말았지요.

임진왜란이 끝난 뒤 그날의 승리을 기념해 덕양산 정상에 대첩비가 세워졌어요.

순찰사는 어떤 일을 했나요? 

조선 시대에 전쟁이 있을 때 왕명으로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순찰하던 임시 벼슬이에요.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물리쳤던 화약 무기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둥근 탄알을 넣어 쏘던 큰 화포인 대완구가 있었어요. 대완구는 폭발하기까지의 시간을 조정할 수 있었지요. 한번에 100발의 화살을 쏠 수 있었던 신기전도 조선의 막강한 화약 무기였어요.

2. 행주 대첩이 대단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권율 장군

권율 장군은 조선 중기의 명장수 중 한 사람이에요. 46세라는 늦은 나이에 관직에 올랐고 63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지요.

임진왜란 당시 수도가 함락되자 이광과 곽영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했어요. 그때 권율 장군은 광주 목사로 곽영의 지휘 아래 들어갔지요.

그 뒤 남원에 머물면서 1,0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해 금산군 이치싸움에서 잘 훈련된 왜군을 상대로 승리했어요.

이로 인해 전라도 순찰사로 승진했지요.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서 3만여 명의 왜군을 물리친 것은 그의 일생 중 가장 큰 업적이었어요. 그리고 임진왜란 7년간 군대를 지휘하며 큰 공을 세웠답니다.

의병이란 무엇일까요? 

나라가 위험한 상황에 빠졌을 때 이를 구하기 위해 군인이 아닌 민간인들이 군대를 조직한 것을 말해요.

2) 행주 대첩에서의 승리

7개 부대로 편성된 일본군이 새벽을 기점으로 공격을 해 왔지만 권율 장군은 이미 강력한 화약 무기들을 준비시켜 놓고 있었어요. 수적으로도 열세1)했던 전투에서 우리나라가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이처럼 신무기들이 동원됐다는 점과 함께 부녀자들까지 나라를 지키는데 동참했기 때문이에요. 부녀자들은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치마에 돌을 날라서 함께 돌을 던지며 싸웠어요.

행주 대첩은 단 하루 만에 끝났어요. 하루 동안 7차례나 크게 싸움을 벌였지요. 우리 군대는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로 엄청난 전투력을 발휘했어요.

결국 일본군의 피해가 갈수록 늘어났어요. 싸움이 막바지에 이르러 우리 군대가 두 배의 지원 병력을 배치하자, 일본군은 더 이상 싸울 생각을 못하고 하루 만에 행주산성에서 물러났어요.

당시 왜군과 싸웠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가 전문적인 군사 훈련을 받은 군인도 아니었어요. 오히려 농민을 비롯한 일반인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에서 이 승리가 더욱 놀라운 것이랍니다.

행주산성 본문 이미지 2

행주 대첩은 부녀자들까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아 승리할 수 있었어요.

의병이 임진왜란 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요? 

나라가 외적의 침입을 받아 위기에 처했을 때, 국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일어나 외적과 싸웠던 의병은 임진왜란 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고구려와 백제가 망한 뒤, 남은 백성들은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 의병을 조직했어요. 1907년 일본에 우리나라의 통치권이 넘어갔을 때에도 전국적으로 의병 운동이 일어났지요. 우리 국민은 나라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스스로 일어나 힘을 모아 나라를 구했답니다.


출처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83385&cid=58584&categoryId=59155



행신동으로 이사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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